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때 엄마에 의해서 TV는 나에게
철저히 차단됐었다.
그때를 생각해보면 ‘이 재밌는 걸 어떻게 참았을까?’ 싶을 정도다.
그러니 그 통제된 환경에서 내가 비디오를 본다는 것은
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.
하지만 이날 운명적인 일이 기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.
사건의 발단은 이렇다.
그날따라 오전에 우리 집은 텅 비어있었고, 우연히 안방에 들린 나는
비디오에 테이프 하나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.
그저 무슨 영화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.
난 자연스럽게 Play 버튼을 눌렀고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.
혀로 입술을 말아 올리며 말하는 멜라니 그리피스와
냉정하면서도 따뜻한 남자 마이클 더글라스.
이 둘의 연기에 난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.
행여 엄마에게 들킬까봐 창문 흔들리는 소리, 잎새이는소리에도
수십 번씩 Stop 버튼을 눌러댔지만 그런 조바심 속에서도
나는 이 영화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.
게다가 마지막 씬에서 내 마음에 파도치던 그 감동의 물결...
그건 언제오실지모를 엄마에 대한 불안마저 어디론가 씻어버리기에
충분했던 것이다.
얼마 전에 TV에서 이 영화가 방영됐다.
반가운 마음에 다시 봤지만 이제 그때의 감동은 느낄 수가 없었다.
그때 마치 007작전을 수행하는 듯 나름대로 절박했던 심정이
어쩌면 영화의 감동을 배가 시켰었는지도 모르겠다.
글 / MitorY
<MBC 라디오 '홍은철의 영화음악'-내가 꾸미는 영화음악>
2000년 7월 14일 방송